[리뷰](여자) 아이들 TOMBOY, 두 개의 모래수렁
(여자) 아이들 TOMBOY (뮤직비디오 캡처) |
오랫동안 나는 TOMBOY가 연필 만드는 회사라고 생각했다.
세상에는 연필 애호가들이 많지만 개인적으로 연필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다.
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, “연필은 굉장히 솔직한 필기구”라는 데에 결론이 미쳤다.
가뜩이나 못 쓰는 글씨인데 연필로 쓰면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못 생긴 글씨가 나온다.
잘 닦아 놓은 거울 같다.
‘사각사각’보다는 ‘슬렁슬렁’한 필감을 좋아하는 편인지라 요즘은 만년필이 내 손에 쥐어지는 시간이 많다.
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.
초등학교 시절,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내 필통 안에는 뾰족하게 깎은 연필 몇 자루와 큼직한 지우개가 자리하고 있었다.
해외 출장을 다녀오실 때면 아버지는 그 좋은 아이템들 다 놔두고(예를 들어 닌텐도 같은 것들) 꼭 학용품을 선물로 가져 오셨는데, 연필 몇 다스는 가장 흔한 품목이었다.
어느 회사에서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노란색 미제 연필이 제일 많았는데, 가끔은 까만 일제 연필도 있었다.
나는 이 까만 일제 연필을 좀 더 좋아했다. 그 이유는 연필에 귀여운 잠자리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.
알파벳을 낱자로 더듬더듬 읽는 수준이었던 나는 이 연필의 브랜드가 TOMBOY라는 것을 간신히 알아낼 수 있었고, “TOMBOY는 잠자리란 뜻이구나”라고 덥석 생각해버렸던 것이다.
그런데 이 이야기는 훗날 반전이 있었으니.
일단 이 연필의 브랜드는 TOMBOY가 아니라 TOMBOW였다.
마지막 W를 Y로 착각을 했던 것인데, 굳이 핑계를 대자면 이 W는 다른 알파벳과 달리 이미지로 처리가 되어 있었다.
그렇다면 왜 TOMBOW일까. 그것은 일본어로 톤보(トンボ)가 잠자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. 그러니까 RAINBOW도 아닌, TOMBOW라는 영어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.
그리하여 나는 나중에서야 TOMBOY가 잠자리는 물론 ‘톰이라는 소년’도 아닌, ‘말괄량이’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.
(여자) 아이들의 TOMBOY가 몇 주째 멜론 차트 상위권에서 단단히 자리잡고 있다. 아이브(IVE)의 ‘러브 다이브(LOVE DIVE)’, 싸이(PSY)의 ‘That That’과 1~3위 자리를 놓고 ‘심각하게’ 각축 중이다.
(여자) 아이들의 TOMBOY는 ‘쎈’ 곡이다. 가사는 물론 뮤직비디오에서도 힘이 뿜뿜이다.
이 곡에는 두 개의 ‘모래수렁’이 있는데, 한번 발이 빠지면 순식간에 목까지 쑥 빨려 들어가고 만다.
첫 번째는 초강력한 베이스 라인.
“Yeah, I'm fu(삐~) tomboy”에 이어 등장하는 베이스의 움직임이 심장을 쿼드러플로 달음박질하게 만든다. 멜로디 밑에 접착제로 착 붙여놓은 듯 일체로 움직인다.
두 번째 늪은 ‘라-라-라’ 부분인데, 살짝 혀 짧은 스타카토풍의 처리가 사뭇 근사하다. 긴장이 탁 풀리면서 마음이 간질간질해진다.
(여자) 아이들(G-IDLE)은 팜파탈적인 이미지를 표출하지만 묘하게도 중성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.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제3의 성(性)이 드러난다.
(여자) 아이들의 TOMBOY에 대한 느낌을 짤막하게 표현하자면 ‘당당하고 창의적인 거래’라고나 할까. 이것이 왜 거래인가 하면, “내가 원하니 내놔라”하는 강압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. 이 세련된 거래는 사뭇 당당하게 이루어지지만 거부하기 어렵다. 여기에 이들의 창의가 깔려 있다.
정황하게 써놓았지만 (여자) 아이들의 TOMBOY에는 표현하기 힘든 구석이 있다. 공식으로 보면 ‘쎈 언니 + 당당함 + 알파(∝)’다. 이 ‘알파’를 밝혀내는 것은 완벽하게 연구자(청취자)들의 몫이다.
한 50번쯤 연달아 들으면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.
(여자) 아이들 TOMBOY (뮤직비디오 캡처)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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